꿩을 사육할 때 하늘을 보지 못하고 땅의 먹이만 보도록 눈가리개를 씌운다고 한다. 처음엔 한동안 하늘을 날고자 하는 야생의 본능을 십분 드러낸다. 하지만 바닥에 널린 풍족한 먹이는 시나브로 본성을 잊게 만든다. 시간과 함께 자신의 본성은 땅에서만 서식하는 동물인 마냥 익숙해진다. 아마도 새끼 꿩들은 어미 꿩들에게 물을 것이다. “엄마 우린 날개가 왜 있는 거죠?” 어미는 이렇게 대답하지 않을까? “쓸데없는 질문 말고 먹이나 더 많이 주워 먹거라”고 말이다.
사육되는 꿩의 신세와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청소년이 닮아 보이는 것은 비약일까? 저마다 가지고 태어난 달란트를 찾아 개성이 넘치는 멋진 꿈을 향해 하루를 채워가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다. 하지만 보다 많은 물질적 풍요라는 먹이만 보도록 하기 위해 서열과 계급이라는 멋진 눈가리개를 하고 있다. 그 눈가리개는 오랜 시간 길들어 있기에 벗어던지면 이단아로 비치는 것이 현실이다. 학년이 높아질수록 눈가리개는 튼튼하고 넓어져 먹이에 더욱 집중하게 만들고 있다.
2020 한국여성정책연구원 통계에 따르면 전국의 사설학원 수는 약81,760여 곳이다. 또한 수강인원은 우리나라 인구의 5분의 2에 가까운 약 1,800만 명이라고 한다. 대한민국 학구열의 가늠자인 반면 높은 서열과 계급을 차지하기 위한 눈가리개가 지능화되었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앞선 조사에서 학원수와 수강인원이 매년 증가한다는 것은 청소년 수가 감소하는 추세와 반대로 나타나고 있다. 이는 잘 사육된 꿩이 새끼 꿩을 위해 더 큰 눈가리개를 씌워 먹이에만 집중케 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이제는 국영수 만큼 꿈을 능동적으로 찾을 수 있는 본성을 깨우는 교육이 필요하다. 꿈이라는 본성을 깨닫게 해주는 교사, 교과서, 도서는 물론이거니와 학교와 학원은 들어본 적이 없다. 학군이 좋다는 지역에는 입시학원은 즐비하지만 꿈의 학원이 있다고 들어본 적이 있는가. 국영수 1타강사는 들어봤어도 꿈을 돕는 1타강사는 전무후무하다. 기껏해야 한정적인 꿈의 학교, 중학교 1학년의 자유학기제, 대안학교가 전부 아니던가. 그나마 실낱같은 긍정적인 요소였던 꿈의 학교 예산도 줄어든다고 한다. 역시나 서열과 계급이 중요하다는 것인지 의문스럽다.
글을 쓰기 위해 하얀 백지를 마주한 적이 있는가? 그림을 그리기 위해 하얀 도화지를 마주한 적이 있는가? 주제가 없으면 하얀 종이는 점점 두려워지고 자신감마저 빨려든다. 일단 뭐라도 쓰고, 뭐라도 그려보자며 덤벼보지만, 결과는 좋은 말로 추상적이다. ‘내일부터’라는 강하고도 달콤한 유혹에 빠지면 그 결말은 눈가리개를 착용하는 것이 최선이라는 퇴행적 깨달음이다. 백지를 채워보지 못한 경험이 개성이 넘치는 글과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자만을 넘어 오만에 가깝다.
자만과 오만은 수많은 도전과 시행착오를 통해 개성있는 색깔로 바뀔 수 있다. 하지만 현실은 종합적으로 그 도전을 가로막고 있는 형국이다. 입시와 입사라는 강철 쇠사슬이 물리적, 심리적 시간을 허락하지 않는다. 또한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이라는 족쇄는 도전의 기회조차 주질 않는다. 그래서 청소년들에게 필요한 것은 다양한 시도를 해볼 수 있는 시간과 금전적 지원 환경이다. 청소년들이 꿈을 찾을 수 있는 시간적 여유를 줄 수 있는 교육환경, 서열과 계급을 떠나 마음껏 다양한 도전을 할 수 있는 사회환경이 필요하다. 그런 환경을 만드려면 인간의 본성을 깨우려는 어미꿩들의 반란이 필요하다.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본다는 고리타분한 눈가리개를 스스로 집어 던질 수 있는 아이가 되면 더없이 좋겠다. 먼저 당연시 여기는 모든 것에 당당히 질문을 던져보기 바란다. 왜요? 왜요? 힘들지라도 그러한 질문에 답을 찾아가는 작은 발걸음이 지금의 눈가리개를 스스로 벗겨 낼 수 있는 큰 힘이 될 것이다. 사람의 본성은 시멘트 박스 안이 아니라 바깥에서 더욱 선명하게 느낄 수 있다는 것을 알면 좋겠다.